Search Results for '나스카'


1 POSTS

  1. 2014/01/16 사기꾼은 물러가라 by etcetera
일찌감치 일어나서 체크아웃. 늦게 잠든 젊은이들은 내가 나갈 때까지 세상 모르고 자고 있다. 나는 얼른 나스카라인을 해치우고(?) 쿠스코로 이동해야 한다.

1층 사무실에 갔더니 스페인어만 할 줄 아는 아저씨 직원이 앉아 있다. 저 간다고 했더니 내 숙박 카드를 보며 어쩌구 저쩌구. 숙박비 냈다는 소리인 것 같아 어제 현금으로 냈다고 하는데도 계속 중얼중얼 하며 8시에 직원이 오니 그 때까지 기다리라 한다.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리라고? 왜? 여기 무슨 호텔임? 나갈 때 물건 검사하고 그런 거임? 아니면 내가 돈을 안 냈다고 되어 있는 거? 어쨌든 나는 8시까지 기다릴 수 없다고. 바쁘다고! 10여분 동안 서로 한 얘기만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다 머리 끝까지 화가 뻗쳤고, 상대방도 적잖은 흥분에 빠졌을 무렵, 나는 기적적으로 구글번역을 생각해 냈다. 한국어-영어 번역은 이상할 때가 더 많지만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조상인 영어와 스페인어 간의 기계번역은 훨씬 이해할 만할 것이다.

아이패드에 창을 띄우고 영작 시작. 저 어제 돈 냈어요. 알겠단다. 그럼 제가 왜 여덟 시까지 기다려야 하죠? 노! 하더니 가라는 손짓을 한다. 아우 정말... 서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포옹하고 마침내 호스텔을 빠져 나왔다. 하지만 지금도 그분이 무슨 얘길 하고 싶어 했는지는 모르겠다. 아 궁금해.

나스카까지는 싸디 싼 소유즈(Soyuz) 버스를 탔다. 이쪽 동네만 운행하는 버스회사로, 호스텔도 겸업하고 있다. 두세 시간을 가는데 5,000원 정도니 엄청 싼 표다. 대신 서비스도 허술해서 고속버스가 아니라 시외버스 같다. 짐 표도 제대로 관리 안 해줘서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그래도 이동시간이 얼마 안 되니까 감수할 만하다.

나스카라인을 보는 방법은 두 가지. 거기 라인 같은 게 있는지 모르고 뚫어버린 아메리카 대륙 관통 고속도로 가에 있는 전망대에 올라가면 두세 개의 라인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나머지 하나는, 경비행기를 타고 죽 둘러보는 것. 당연히 경비행기 쪽이 좀 더 인기 있고 비싸다. 이왕 보는 거 경비행기를 타기로 진작 마음먹었는데, 나스카라인을 보겠다는 욕심보다는 경비행기를 한 번 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스카 터미널에 내려 쿠스코 가는 표를 먼저 끊으려는데 헉, 두세 군데 들렀음에도 오늘밤 표가 없단다. 일단 표를 확보해 놔야 뭘 해도 마음이 놓이기에 다른 버스 회사로 이동하려는 찰나, 삐끼에게 붙잡혔다. 이카에서부터 예약하고 온 호주 언니 둘을 픽업하러 온 삐끼였다. 버스 표를 먼저 구해야 한다고 했더니 괜찮다고, 이 언니들도 구경하고 쿠스코로 갈 거라고, 표 있으니 걱정 말라고 막 꼬드긴다. 호주 언니들도 뒤에서 끄덕끄덕 하고. 가격도 90달러던가? 아무튼 싸게 부르기에 에라 모르겠다 따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인간 완전 사기꾼. 일단 호주 언니 둘과 나를 떼어놓고 상담할 때부터 이상했다. 소곤소곤하는 대화 사이로 내용이 살짝씩 들리는데, 니네가 예약한 건 90불짜리 상품이지만 사실 요 상품이 더 좋은 건데, 이건 비싸지만 쟤(나를 일컬음)를 데려왔으니까 좀 깎아줄게 어쩌구 저쩌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삐끼와 독대. “자 봐봐, 니가 가겠다고 한 비행기는 무려 20인승이야. 그게 90달러지. (친절하게 사진까지 보여준다) 이거 잘못 타면 가운데 끼여서 나스카라인이고 뭐고 아무 것도 못 봐. 대신에 이거(옆 사진) 봐봐. 6인승 경비행기인데 훨씬 좋아.” “그래서 그건 얼마인데?” “145달러.” (웃기고 있어 정말) “그럼 난 그냥 90달러짜리로 할게.” (삐끼 당황) “아니 아니, 진짜 안 보인다니까.” “할 수 없지. 그리고 내 친구들한테 들은 가격은 이게 아닌걸.” “좋아, 그럼 특별히 너만 깎아주지.” 하면서 흥정 시작. 145가 120인지 130인지 115인지가 되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나는 무조건 90을 부르며 앉아 있었다. 마지막엔 “야! 나는 그냥 얻어 걸린 거잖앗!” 하고 옜다 봐줬다 하는 심정으로 계산기에 100을 찍었더니 결국 항복. (나중에 알고 보니 호주 언니야들한테 받은 가격도 100.) 싸게는 아니어도 그냥 저냥한 가격이니 만족하려 했으나 수가 너무 빤히 보인 데다, 그렇게 사기 친 돈으로 샀을 것이 분명한 최신 투싼(응, 현대의 그 투싼)을 타고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니 기분이 점점 나빠진다. 그래도 그 사기꾼, 오후에 온 유럽 사람들에게 똑같은 사기를 쳤는데, 아무 의심 없이 145달러를 지불한 독일 아저씨한테 호주 언니야들이 “우리는 100달러 냈는데?” 하고 천진하게 얘기하는 통에 사기꾼 초난감해지고, 독일 사람은 따지고, 사기꾼은 호주 언니들한테 그 얘길 왜 하냐고 성질 내고... 하는 통에 기분이 아주 약간 좋아졌다. 어쨌거나 오래 있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호스텔과 겸업하는 곳이었는데 이름도 론리에 나오는 호스텔과 헷갈리게 지어놨던... 아 까먹었다. 내 한국 가면 반드시 경종을 울리리라! 했건만;

나스카는 라인보다 비행기 타서 본 풍경이 훨씬 좋았다. 굉장히 독특한 지질이라 그렇게 오랫동안 라인이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었던가 보다. 그러나 정작 라인은 너무 높은 데서 봐서인지 큰 감흥이 없었다. 뭔가 그냥 장난감이나 낙서 같았달까. 그 스케일 감상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전망대가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좋은 건 자연 다큐멘터리이고; 내게 이날의 투어는 그저 ‘경비행기 체험’이었다는.

공항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다시 돌아온 호스텔에는 사기꾼이 있었고, 볼일(=돈 받기)이 끝났으니 터미널에 다시 데려다 줄 어떤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일행이었던 다섯 명 중 네 명은 함께 비행기를 타면서 친해졌는지 자기들끼리 아르마스 광장에 밥 먹으러 갔고, 혼자 다른 비행기에 탄 데다 사교성은 요만큼도 없는 나만 호스텔로 돌아왔는데 막막하다. 저 사기꾼, 아침만 해도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굴더니... 일단 짐을 두고 터미널까지 걸어가 겨우 겨우 밤 11시 59분에 출발하는 최고급 버스 표 한 장, 마지막 남은 딱 한 장을 구했다. 우리 돈으로 8만 원 돈 하는 표를 보며 머리를 쥐어 뜯었다. 으아아악, 아주 돈을 뿌리려고 작정한 여행이 아니고는 이럴 수가 없다. 왜, 왜! 어제 와카치나에서 표를 안 샀던 거냐!

그 사기꾼의 집에 더는 머물고 싶지 않았기에 조용히 짐을 챙겨 터미널로 돌아와 이제는 익숙해진 버스 기다리기를 시작했다. 까짓, 6시간쯤이야.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etcetera

2014/01/16 19:56 2014/01/16 19:56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etceteras.pe.kr/rss/response/189


블로그 이미지

투덜투덜

- etcetera

Archives

Authors

  1. etcetera

Recent Posts

Calendar

«   2017/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Site Stats

Total hits:
1004996
Today:
464
Yesterday:
539